‘취중진담’의 비밀, 뇌파로 밝히다
민감도 높은 뇌활성도 측정방법 개발
강남을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이재원 교수
술을 마시면 평소 이성적이었던 사람도 가슴 속에 담아 두었던 진심을 내비치거나 다른 사람의 비밀을 폭로하기도 한다. 이렇게 술자리에서의 감정적인 행동 때문에 다음 날 이불 속에서 하이킥을 하며 몸부림쳤던 경험, 누구나 한 번쯤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술만 마시면 평소와 전혀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최근 강남을지병원 이재원 교수 연구팀이 찾아냈다. 연구팀은 고민감도 뇌활성도 측정방법을 개발해 음주로 인한 뇌활성도 저하현상을 측정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취중진담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세타-감마 교차주파수 동기화 현상 적용
최근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응답하라 1994’를 보면 하숙생 중 한 명인 윤진이의 주사 에피소드가 종종 등장한다. 평소 말수가 적었던 이 여학생은 술만 취하면 친구들의 비밀을 술술 말해 비밀이 밝혀진 주인공들에게 당황과 공포를 안겨주고는 했다. 이처럼 술에 취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주사의 정도가 심할 경우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며 주폭이라는 사회문제를 낳기도 한다. 뇌 안에 있던 이성의 자리를 술이 차지하면서 점차 감정의 증폭만을 남기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다.
“술은 과거 마취제로도 사용했을 정도로 신경활동을 억제하는 효과를 가진 물질이었습니다. 그런데 술이 신경억제 효과를 가지면 수면제처럼 마시고 바로 자야할 텐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행동이 많아지거나 충동적이 되기도 하죠. 이것을 이해하던 방식이 바로 뇌의 계열화 모델입니다. 뇌는 상위구조가 아래구조를 조절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죠. 인간이 가진 이드라는 본능이 이고라는 이성에 의해 조절되는 것과 유사한 개념인데요. 따라서 술이 가장 상위의 이성을 마취시킨다고 이해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아래에서 이성의 통제를 받던 감정이 해방되면서 마음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지금까지는 음주상태에서 뇌파 변화를 제대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알코올 양이 매우 적을 경우 인지능력 저하를 측정하기도 어려웠다. 뇌파의 크기를 평균해 정량화하는 방식이나 뇌파를 주파수 성분으로 분리해 정량화하는 방법이 있기는 했지만 복잡한 뇌파의 특성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이재원 교수 연구팀은 세타파와 감마파 동기화 현상을 적용해 혈중 알코올 농도에 따른 미세한 뇌파 변화를 잡아낼 수 있는 고감도 뇌활성도 측정기술을 개발했다. 나아가 이를 이용해 술 한 잔이 이성적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대뇌피질 활성에 미치는 영향을 측정했다.
“세타-감마 교차주파수 동기화 현상이 사람의 인지프로세스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술을 마시면 인지프로세스에 변화가 생길 것이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고, 술을 마셨을 때 세타-감마 교차주파수가 변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는 것이죠. 이러한 가설을 바탕으로 고민감도 두뇌활성화 측정기술을 개발하고자 했습니다.”
인간의 두뇌활동에 따라 나타나는 주파수의 크기는 델타(1~4Hz), 세타(4~8Hz), 알파(8~12Hz), 베타(12~30Hz), 감마(30~80Hz)로 구분된다. 이들 중 세타파의 위상과 감마파의 크기가 동시에 같이 움직이는 세타-감마 교차주파수 동기화 현상이 사람의 인지 프로세스와 관련이 있다는 것. 즉, 동기화 정도가 높으면 인지 능력도 높아져 이성적 판단이 수월해지는 반면 낮으면 이성적으로 행동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이에 따라 연구팀은 세타-감마 교차주파수 동기화 정도가 음주 상태에서는 낮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실험에 돌입했다.
음주로 인한 뇌활성도 저하현상 측정 성공
연구팀은 정상인 21명을 대상으로 오렌지주스만 마신 경우와 술이 섞인 오렌지주스를 마신 경우의 뇌파를 측정해 세타-감마 교차주파수 동기화 정도를 정량화했다.
먼저 3분 동안 눈을 감은 상태에서 쉬는 동안의 뇌파를 측정했다. 이후 피험자의 반은 술을 탄 오렌지주스(500mL 오렌지 주스에 0.7g/Kg 알콜농도)를 30분 간 천천히 마셨고, 다른 한 그룹은 500mL 오렌지 주스만 마셨다. 음료를 마신 후 한 시간 경과 후 다시 뇌파를 3분 동안 측정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다시 같은 피험자를 대상으로 술을 탄 오렌지주스를 마셨던 그룹은 이번에는 오렌지주스만 마시게 하고, 오렌지주스만 마셨던 그룹은 술을 탄 오렌지 주스를 마시게 했다. 이렇게 같은 피험자에 대해 술을 탄 오렌지주스를 마셨을 때와 오렌지주스만 마셨을 때의 뇌파 전후변화를 측정했다.
그리고 19채널의 전극을 머리 모든 영역에 골고루 붙여서 뇌파를 측정했고, 샘플링 주파수는 1000Hz를 이용했다. 전극의 저항(impedance)은 10kOhm 이하로 유지해 전극에서 측정하는 뇌파의 정확도를 향상시켰다. 측정된 뇌파는 Independent Component Analysis (ICA)를 이용해 눈움직임, 눈깜박임, 머리움직임, 근육움직임에 의한 노이즈를 효과적으로 제거했다.
“실험 결과 오렌지 주스를 마셨을 때보다 술을 마셨을 때 세타-감마 교차주파수 동기화가 현저하게 떨어짐을 확인했습니다. 지금까지의 분석방법으로는 술 한 잔 마셨을 때 뇌파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죠. 이번에 저희 연구팀이 개발한 새로운 고민감도 분석방법을 통해 술을 한 잔 마셨을 경우 대뇌 인지기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습니다.”
즉, 두뇌의 세타파와 감마파가 동시에 박수를 치는 것에 비유되는 세타-감마 교차주파수 동기화 정도가 알코올에 의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이 방법은 주파수끼리의 상호작용을 정량화함으로써 뇌활성도를 민감하게 분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알코올은 자살을 비롯해 폭력 및 범죄에 이성적인 제어장치를 무너뜨리게 할 목적으로 매우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술을 마시고 자살시도를 하고, 폭력 또한 술을 마신 상태에서 흔하게 발생하죠. 간단히 측정할 수 있는 뇌파장비로 이 같은 알코올의 이성억제 현상을 미리 발견할 수 있다면 개인용은 물론 필요로 하는 다양한 곳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술을 이용해서 뇌의 이성억제정도를 파악하는 장치를 개발하는 것이 향후 목표인데요. 성공한다면 알코올 뿐 아니라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우울증, 정신분열증을 포함한 각종 정신질환 진단에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재원 교수와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계산신경시스템학과 윤경식 박사가 공동으로 수행한 이번 연구는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이 추진하는 학문후속세대양성사업 등의 지원으로 수행되었고, 연구결과는 약물중독분야 학술지 ‘알코올중독(Alcoholism : Clinical and Experimental Research)’ 온라인판 2013년 11월 20일자에 게재되었다.
뇌기능의 균형을 찾다 ‘중독브레인센터’
이재원 교수는 현재 강남을지병원의 중독브레인센터 수장을 맡아 센터를 이끌고 있다. 중독브레인센터는 중독 질환에 대한 심각성이 더해지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됨에 따라 강남을지병원이 지난 2013년 1월 야심차게 출범시킨 중독 전문 클리닉이다.
센터는 인터넷게임 클리닉, 알코올 클리닉, 겜블링 클리닉, 약물 클리닉, 금연 클리닉 등 총 5개 분야에 걸쳐 정확한 진단과 치료가 이뤄지고 있다. 특히 강남을지병원은 국내에서 1대뿐인 뇌파 기기를 설치하고 명망 있는 전문의들로 의료진을 구성하는 등 중독 분야에 특화된 센터를 만들기 위해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저희 중독브레인센터에서는 뇌파를 비롯한 다양한 두뇌검사로 뇌기능을 측정하고 약물 또는 비약물의 맞춤형 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사실 중독 질환은 그 심각성을 환자들이 잘 인지하지 못하고 치료에 소극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뇌검사 결과를 환자들에게 직접 보여줌으로써 뇌기능이 현재 불균형 상태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이해시키면 중독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줄이고 치료의 적극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인터넷게임 클리닉에서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면담 및 뇌기능 검사를 포함하는 신경심리학적 평가를 통해 인터넷 중독 여부를 파악한다. 특히 우울증, 불안증, 대인공포증, 왕따,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가정불화가 있는 경우 인터넷게임 중독의 위험이 크게 증가하고 치료도 어렵기 때문에 집중력검사, 우울, 불안장애에 대한 검사 및 가족력 조사를 거쳐 위험요소가 얼마나 존재하는지 진단한다.
“사람은 악수, 팔짱, 포옹, 키스와 같은 서로 간 상호 소통을 좋아하도록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중독성 높은 인터넷게임에 몰두하게 되면 사람은 이러한 본능을 하나 둘씩 잃어버리고 결국 사회성이 결여되면서 충동적이고 공격적인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인터넷게임 클리닉은 이러한 어려움에 처한 분들에게 중독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모습을 되찾도록 돕기 위해 개설되었습니다.”
인터넷게임 클리닉은 뇌파검사를 통해 뇌기능상의 불균형을 알아보고 개개인에 맞춘 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뇌기능불균형 교정을 통해 스스로 조절능력을 키우고 자발적으로 중독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기본 치료 방향이다.
알코올중독에 대해서도 전문적인 상담과 평가, 치료가 진행되고 있다. 사람은 적은 양의 술을 먹더라도 음주 이후에는 알코올에 의한 뇌의 변화가 발생하는데 음주 양이 많아지거나 음주 횟수가 많아질수록 알코올에 의한 뇌 기능 변화는 점점 커지게 된다. 변화된 기능이 회복되는 데도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이렇듯 과음이나 지속적인 음주 또는 잦은 음주 등은 간과 뇌를 포함한 여러 기관의 신체기능을 변화시키게 되고, ’음주에 대한 통제력 상실’을 유발하게 된다. 알코올 클리닉에서는 이러한 ‘음주에 대한 통제력이 상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뇌기능의 회복 치료를 제공하고 음주 습관 개선을 위한 전략을 함께 만들어 가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우선 포괄적 평가를 통해 음주습관 및 음주로 인한 신체적, 심리적 영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문제의 수준에 맞는 개별화된 목표를 설정하게 되는데 이에 따라 바른 음주 습관 구성 및 교육, 약물치료, 비약물치료 등의 치료가 진행된다.
이외에 겜블링 클리닉, 약물 클리닉, 금연 클리닉 등에서도 중독 문제를 종합적이고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이에 적합한 맞춤형 치료 방법을 제공하고 있다.
“중독브레인센터는 경두개 자기자극술, 뉴로피드백과 같은 비약물치료를 활용해 의료서비스의 폭을 넓히고 다양화한다는 점도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물만으로는 100% 치료가 불가능하고, 약물이 뇌 이외의 다른 신체기관에도 작용을 해 부작용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비약물치료의 필요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죠. 최근에는 경두개 직류자극술에 대한 임상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만큼 실용화될 경우 저희 센터에서도 빠르게 도입해 치료의 효과를 높일 계획입니다.”
도전은 모든 위대한 일의 시작이다
기존의 것만 고집해서는 결국 그 이상이 되기 어려운 법이다. 상식의 틀을 벗어난 도전만이 창조와 혁신을 이룰 수 있다. 최근 민감도가 높은 뇌활성도 측정방법 개발에 성공하며 커다란 주목을 받은 이재원 교수의 행보는 이러한 대명제와 맞닿아 있다. 정신과 의사로서의 길을 선택한 데 이어 카이스트에서 바이오 및 뇌공학 박사학위를 수료한 이재원 교수는 임상의이자 뇌공학 연구자로서 남들과는 사뭇 다른 길을 걸어 왔다.
“학창시절 혼자만 있고 싶고, 다른 사람들을 피하고 싶은 심리적 문제를 겪었던 적이 있어요. 이러한 고민이 진로를 선택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저는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신과 공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정신과를 가기 위해 의대 진학을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전문의가 되고 난 후 뇌공학에 대한 관심이 더해지면서 카이스트에서 박사과정을 밟게 되었는데요. 카이스트에서는 주로 뇌파와 관련해 우울증이나 충동장애 등 다양한 상황을 수치화하는 데 중점을 두고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남다른 길을 선택한 소신과 함께 새로운 도전에 대한 용기가 더해지면서 이재원 교수는 의학계와 과학계에서 찬란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 2011년 ‘The relationship between theta-gamma coupling and spatial memory ability in older adults’를 Neuroscience Letters지에, 2013년 ‘Correlation of risk-taking propensity with cross-frequency phase?.amplitude coupling in the resting EEG’를 Clinical Neurophysiology지에 게재한 데 이어 최근 고민감도 뇌활성도 측정방법 개발까지 괄목할만한 연구성과를 창출해왔다. 무엇보다 이재원 교수의 연구는 임상에서의 진단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연구성과의 임상 적용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정신과의 경우 다른 진료과처럼 청진기나 검사기기를 이용해 진단을 내리는 것이 어렵고, 환자 상담을 기반으로 한 의료진의 판단이 중심이 되다 보니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발생하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정신과도 뇌의 이상신호를 분석하고 그 정도를 수치로 나타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만약 정신질환 진단의 수치화가 임상에서 이뤄진다면 정상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고의적으로 정신과에 입원하는 사례가 없어지는 것은 물론 조기 진단과 예방이 가능해진다.
“정상과 질환상태를 구분해내는 기술이 검증된다면 이제 우울증이나 불안증도 내과에서 방사선 촬영을 하듯 뇌파검사를 통해 진단 받고 치료 받을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는 것이죠. 뇌파는 어느 병원이나 가지고 있는 간단하고 저렴한 검사도구인 만큼 이번에 개발한 측정방법을 임상에서 쉽게 활용 가능하도록 소프트웨어 개발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밖에 여러 가지 통제 불능 상태에 대한 연구를 지속해 정신질환에 과학적인 진단을 마련하도록 노력할 계획입니다.”
시작은 스스로를 돌보기 위한 소박한 희망에서 출발했지만 이재원 교수는 거듭되는 도전을 거치며 어느덧 정신의학계의 새로운 길을 여는 주역으로 자리매김했다. 매번 상식을 뛰어넘어 온 그를 보며 문득 이런 말이 떠올랐다. ‘도전은 모든 위대한 일의 시작이다.’ 이재원 교수의 새로운 도전이 정신질환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의 ‘위대한 희망’이 되기를 마음 깊이 기대해본다.
<이 기사는 사이언스21 매거진 2014년 3월호에 게재 되었습니다.>